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사 상륙작전 (문단 편집) === 작전 발령과 출동 준비 === 1950년 8월 말, [[인천 상륙작전]]의 결행이 결정되자 유엔군 및 한국군은 여러 기만작전을 동시에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서해안에서 군산 기습작전이 준비된 것과 마찬가지의 작전을 동해안에서도 결행하려고 했다. 군산 기습작전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인천 상륙작전]] 2일 전인 9월 13일에 웨어(James H. Wear) 소령이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직할 침투중대(Raider Company)와 영국 해군의 자원병들로 이루어진 혼성 특수부대가 영국 해군의 방공호위함 [[https://en.wikipedia.org/wiki/HMS_Whitesand_Bay_(K633)|HMS 화이트샌드베이(Whitesand Bay)]]의 지원을 받아 군산 인근 해안에 공격을 감행한 소규모 양동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해안 방어부대의 반격을 받아 3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곧장 퇴각하였다.[* 이들은 퇴각 후에 본 공격인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이와 같이 잘 훈련된 소규모 특수부대가 동해안 요충지에 치고 빠지기 식의 작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군은 제8군 직속으로 새로 창설된 [[레인저]] 중대(Ranger Company)를 투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검 결과 이 부대는 아직 훈련이 완료되지 않아 실전 투입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는다. 대신 유엔군 총사령부에서는 한국군 육군본부를 통해 영덕-포항 등 동해안 전선을 담당한 제3사단에서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상륙작전을 벌일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문제는 9월 초에 포항 일대의 전선이 북한군 제2군단을 상대로 절체절명이었다는 점이다. 일단 [[영천 전투|영천·신녕 방면]]에선 북한군 제766부대와 제8사단, 제12사단, 제15사단 병력들이 연이어 전선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고, 동해안 쪽의 북한군 제5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계속 압박을 가해 경주와 영일비행장으로의 돌파구를 뚫기 일보 직전에 있었다. 그러니 국군 3사단으로서는 1개 대대 차출도 곤란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안은 한국 육군 입장에서도 매우 매력적이어서 그냥 포기하기는 아까웠다. 이때 육군에서 주목한 것이 제1 유격대대였다. 일설에는 제3사단에서 예하 병력을 빼내기 곤란하자 대신 유격대대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도 한다.[* 아이디어를 낸 인물이 제3사단 사단장이던 [[김석원]]인지, 실질적으로 사단장 역할을 수행하던 [[이종찬]]인지 아니면 다른 참모장교인지는 불분명하다.] 편성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제1 유격대대를 부산의 육군본부로 불러들인 것도 이런 양동작전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강문봉]]은 이러한 작전 내용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가 9월 10일 무렵에야 이명흠을 호출하였다.[* 이명흠 대위 본인은 훗날 회고에서 강문봉이 자신을 호출한 날은 12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강문봉]]은 이 자리에서 뜬금없이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위치한 적 후방인 장사 해안에 상륙하라[* 생존자 중에는 원래 목표는 조금 더 북쪽에 있는 강구였으나 좌초 때문에 장사동에 상륙했다고 증언한 이도 있다. 당시 특공대원들에게 정확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는 지시를 내린다. 이명흠은 이제 막 2주 남짓밖에 훈련을 받지 않은 이 부대가 상륙작전을 수행하는건 무모한 짓이라고 항변하였다. 하지만 [[강문봉]]은 전선에서 빼낼 정규부대는 전혀 없으며, 포항 지구 전선을 압박하고 있는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력을 꺾기 위해서는 후방 보급 차단이 불가피하다고 무조건 실행을 명령하였다. 당시 [[인천 상륙작전]] 준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던 이명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륙작전이었지만, 육군본부가 다음의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51844242|작전명령 제174호]]로 출동을 정식 명령했으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 '''군사극비''' > 육본 작명 제174호, 육군본부 경남부산, 4283[* 당시에는 서기가 아닌 [[단군기원|단기(檀紀)]]를 쓰고 있었다.].9.10.16:00 > > 1. (1) 적 약 2개 사단[* 북한군 제5사단과 제12사단이 주축이었다.]은 포항(1234-1461) 안강(1220-1455)선을 점령하고 계속 남침을 기도하고 있음. > (2) 아군 제3사단은 차 적에 대하야 맹렬한 섬멸을 전개하고 있음. > 1. 군은 일부 부대를 이동하려 함. > 1. (1) 육본 직할 유격대장은 예하 '''제1대대를 D일 H시 P장소에 상륙을 감행'''시켜 동대산(1225-1493)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제1군단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 > (2) 세부는 작전교육국장으로 하여금 지시케 함. >…(후략)… > ---- >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51844242|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 원문 보기]] (국가기록원) 위의 명령서 내용에서 보듯 명령서에 시간과 장소는 적시하지 않았고, 이후 구두로 '''9월 15일[* 장사 상륙작전에서 실제 장사해안 상륙일을 일부 기록에서는 9월 14일로 적고 있다. 이것은 원래 작전계획이 9월 13일 부산항 출발, 9월 14일 장사해안 상륙일이었는데 태풍으로 작전이 하루가 연기되었기 때문에 생긴 착오라는 설이 있고, 이명흠 대위가 사후에 증언록에서 9월 13일 부산항 출발, 14일 상륙으로 잘못 기술한 결과로 발생한 착오라는 설이 있다. 전쟁 중에 국방부에서 출간한 『한국전란 1년지』(1951)에서는 출발일은 없으나 상륙일이 15일로 되어 있고, 해군본부 전사편찬관실에서 펴낸 『대한민국 해군사』(199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펴낸 『6·25 전쟁사 6: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2009) 등 당시 공식문서들을 참조하여 최근에 저술된 기록에서는 9월 14일 출정, 15일 장사해안 상륙일로 확정하고 있다.]에 장사 해안에 상륙'''하도록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부대는 9월 12일부터 본격적인 출동준비에 들어갔고, 작전 불과 2일 전인 이때야 비로소 제1군단으로부터 전투물자를 지급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9월 13일, 출동 전날에 작전을 위한 부대 재편성이 있었다. 기만작전의 성격상 이 부대는 대대급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으로 위장하였으며, 당초 3개 중대, 이후 180명씩 4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던 각 중대는 '연대'로 호칭하였다. (1중대→제28연대, 2중대→제29연대, 3중대→제32연대, 5중대[* [[4자 금기]]에 따라 4중대 대신 5중대가 있었다.]→제37연대) 정규 장교인 지휘관들에게도 모두 임시 계급을 부여해 이명흠 대위는 '임시 소장' 계급을 달았고, 각 중대장들도 임시 대령(또는 중령) 계급을 부여받았다. 9월 14일에는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정식 출정식'''까지 거행하였다.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는 부대들의 경우 보안을 유지하며 조용히 빠져나간 데 반해, 이들의 출정식에는 무려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육군본부의 고위 장교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출정식 이후에는 육군본부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뒤, 트럭을 타고 부산항 제4부두로 이동했다. 이것도 일부러 백주대낮에 대로를 따라 실시하여 시민들의 환송까지 받을 정도였다. 편성된지 3주밖에 안 되는 학도병 중심의 대대급 부대의 출정을 사단급 부대의 대규모 작전이라고 의도적으로 과시, 역정보를 흘리려는 [[성동격서]]라 할 수 있었다. 기만술책은 부두에서도 계속되었다. 부두에는 미군 병력도 대기하고 있었는데, 대대는 탑승할 문산호를 지정받은 뒤에 미군과 번갈아 승선과 하선을 수 차례 반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역시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북한 간첩들에게 장사 상륙작전이 사단급 한국군 병력뿐 아니라, 미군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작전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기만술책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최종적으로 16시까지 모든 조치들이 완료되어 출항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기만까지 신경 쓴 그럴듯해 보이는 작전 이면의 지원 계획은 형편없었다. 무엇보다 상륙작전 성공에 필수적인 화력 지원이 매우 부실했다. 당초에 유격대대의 투입을 제안한 제3사단은 훈련이 부실한 이 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미 육군에서도 1개 전차중대와 1개 전투공병소대를 참여시키고 미 해군은 강력한 예비포격을 퍼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과 낙동강 전선의 방어에 역시 전력이 대거 투입된지라 유엔군 총사령부는 이 요청을 단칼에 거절한다. 게다가 막강한 화력의 중순양함~구축함 다수를 이끌고 동해안 포격지원 임무에 투입된 미 해군 95.2기동전단(Task Group 95.2)[* 유엔군 총사령부는 [[인천 상륙작전]]을 즈음해 한반도 연안을 꽁꽁 틀어막기 위해 대만 해역에 있던 미 해군 함대를 불러들여 제95기동부대(Task Force 95)를 편성, 투입하였다. 이 가운데 서해를 담당한게 95.1기동전단, 동해를 담당한게 95.2기동전단이었다.]은 9월 15일에 삼척을 포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 바람에 (미군 레인저를 이용한) 상륙작전 논의 초기부터 관여되어 있던 95.2기동전단 전단장 하트먼(Charles C. Hartman) 소장은 아예 상륙작전이 취소된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대신 미 해군은 [[글리브스급 구축함]] USS 엔디코트(Endicott)(DMS-35) 함 1척만을 지원해준다. 만약에 상륙 당일 삼척 포격 대신에 95.2기동전단이 일부라도 추가 지원에 나섰더라면 장사 상륙작전의 결과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란 점에서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LST 문산호에 탑승한 병력은 본래의 제1 유격대대 병력 외에도, 육군본부에서 통신지원차 파견한 제51 통신대 소속의 통신병 12명, 문산호 선원 42명, 해군 헌병 5명이었다. 또한 육군본부는 대대의 부족한 실전경험을 보완하고자 개전 시 제1사단 12연대장이었던 [[전성호]][* [[전성호]] 대령은 독립운동가 집안(부친은 간도 룽징(龍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전재일) 출신으로, 본인도 만주에서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휘하에서 [[지청천]], [[김좌진]], [[황학수(독립운동가)|황학수]] 등과 함께 무장 항일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1896년 생으로 이미 광복 당시에 50세에 이를 정도였으나, [[육군사관학교]] 1기로 임관하여 현역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이 나이면 [[김홍일(군인)|김홍일]] 장군보다도 연배가 높았고, [[채병덕]], [[이종찬]], [[김백일]] 등 당시 주요 지휘관보다는 20년 이상 연장자여서 육군 내에서도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당장 개전 시 제12연대의 상급부대였던 제1사단 사단장 [[백선엽]]은 24세나 어릴 정도였다. 이 때문에 [[전성호]] 대령은 야전 지휘관에서 곧 물러나 이런 고문 역할로 돌려지게 되었다.] 현역 대령을 전술고문으로 임명하고 연락병 3명을 배속시켰으며, 과거 [[국민혁명군]] 출신으로 실전경험이 있던 박영선을 정략고문으로 임명하는 등 총 3명의 민간인도 탑승시켰다. 미 해군 소속으로는 엔디코트 함에서 통신을 위해 파견한 연락장교 1명(해리슨 중위)과 부사관 1명(쿠퍼 상사), 통역 1명이 탑승했다. 이들 총 841명이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